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사카 전투 (문단 편집) == 호코지 종명 사건 == 이에야스는 겉으로는 계속 유화적인 척 했다. 그 중 하나로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명분으로 긴키 지역의 각종 신사와 사찰들을 신설, 수리할 것을 히데요리에게 건의한다. 히데요리로서는 방심할만한 호의였지만 도요토미가의 부를 줄이려는 의도이기도 했다. 가문의 부흥을 위해 많은 돈을 쓰게 되었고, 결정적인 --억지-- 명분 또한 여기서 나오게 된다. 1614년, 5년간의 공사 끝에 교토의 호코지 대불전이 완성되었고, 이어 범종도 완성되었다. 문제는 이 범종에 새겨진 글귀. "'''국가안강 군신풍락([ruby(國家安康, ruby=)], [ruby(君臣豊樂, ruby=)])'''"을 두고 이에야스(家康)의 이름을 두 글자로 쪼개고 도요토미(豊臣)가의 이름을 거꾸로 넣은 것이므로, 이에야스를 저주하고,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음모론적 해석이 이루어져 트집거리가 된 것이다. 전자에 비해 부각되지 않지만 트집잡힌 문구 하나가 더 있었는데, 범종 초입부에 기재된 "'''우복야원조신가강공([ruby(右僕射, ruby=)][ruby(源朝臣, ruby=)][ruby(家康公, ruby=)])'''"이란 문구. 당시 어용학자들은 사원조신가강공(射源朝臣家康公), 즉 "도쿠가와 이에야스[*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다이진(= 우복야) 직위를 임명받았었고, 도쿠가와 가문은 마츠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꿀 때에 세이와 겐지(그중에서도 [[카와치 겐지]])의 후손인 닛타 씨의 후손을 자칭했었다.]를 (활로) 쏜다"라는 [[견강부회]]식 해석을 내놓았다. 이 해석들은 모두 이에야스의 어용 학자들[* 이들 중에는 동아시아사를 공부하면 익숙한 하야시 라잔도 있었다.]의 작품이었다. 이를 새긴 승려는 전자는 부정했지만 도요토미가의 부흥은 인정하였다. 이게 진짜 트집잡기라고밖에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,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글귀는 바꾸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잘만 남아있다. 물론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비해 [[피휘]] 문화가 덜 발달한 덕분에 해당 글귀가 그대로 남아있는 면도 있을 것이다. [[파일:external/kyoto-k.sakura.ne.jp/mhoukouji1.jpg]] 관광객 보라고 한 건지 후대에 하얗게 칠해놨다. 많은 문장 가운데 한 귀절이다. 어쨌든 이런 억지에 도요토미 측에서는 전쟁 준비를 하는 한편, [[카타기리 카츠모토]][* [[시즈가타케의 칠본창]] 중 한 명이다.]를 보내 화의를 청한다. 하지만 이에야스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3가지 요구조건을 듣게 된다. > 1. 히데요리가 [[에도]]로 직접 와서 [[도게자|이에야스를 알현할 것]] > 1. 요도도노를 인질로 에도에 보낼 것 > 1. 오사카 성을 나와 이에야스가 지시하는 곳으로 이봉할 것 셋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는데 1은 도요토미 가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얘기고, 2는 히데요리의 생모를 인질로 보내서 히데요리가 일거수 일투족을 히데요리의 의도대로 행동할 수 없게 묶기 위한 것이며, 3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의 [[고쿠다카]]를 어떤 곳으로 이봉시킬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. 한마디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명분쌓기용 요구라, 결국 도요토미측은 이것을 모두 거부하고 이에야스와 전쟁을 결심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